
네 번째의 여름
if.아이들이 인간세계로 탈출한 후의 이야기
이리어리 @E_riary
3.
이곳으로 와 두 번째로 맞게 된 여름에서 그들은 여행을 떠났다. 이곳에 적응이 좀 되자, 그들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이 너무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엠마와 노먼과 레이는 바닷가에서 놀기도 했고, 유명 관광명소를 돌아다니기도 했으며, 세계 도시들을 구석구석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그 여행일정에선 모나리자를 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인간계에 가면 하고 싶었던 레이의 소원. 그림 앞에 오랫동안 서 있는 레이의 옆에서 노먼과 엠마는 같이 기다려주었다.
“인간계에 가면 모나리자를 봐야지, 하고 생각했던 게 6살쯤이었어. 왜, 어린 애들은 흔히 책이나 그림으로 뭘 보면 나도 봐볼래! 이런 생각을 하잖아. 미래에 이뤄질지 안 이뤄질지 모르는 한순간의 바람들. 근데 그 즈음에 엄마한테 일상이 허구인 걸 확인받고 나니까, 왠지 모르게 간절해지더라.”
그날의 일정이 끝나고 저녁을 먹으며 레이가 불쑥 꺼낸 말이었다. 레이가 그림을 보면서 직접 보니 생각보다 더 대단하다! 라고 여겼는지 직접 보니 생각보다 별로네 라고 생각했는지 엠마는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이가 무언가 만족한 거 같으니 그것만으로도 괜찮지 않나라고 여겨졌다.
“난 또, 레이가 그림 속 분한테 반해버린 줄 알았지. 레이와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라니..”
갑작스런 노먼의 말이었다. 레이를 바라보는 노먼의 눈동자가 촉촉한 걸 보고 엠마는 웃음이 빵 터졌다. 동시에 노먼의 입가가 비웃는 것처럼 씰룩대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언제든 응원한다고.”
노먼이 한마디를 더 날리며 레이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자 엠마는 이제 자지러졌다. 나도 레이의 사랑을 응원해! 엠마의 말을 뒤이어 들으며 레이의 표정은 썩어 들어갔다. 테이블위에 머물러있던 진지함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유쾌함이 들어찼다. 곧이어 레이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같이 웃자, 웃음소리가 가득해졌다.
웃긴 게 아니고 어이없어서 웃는 거 알지? 레이의 말을 들으며 노먼과 엠마는 보란 듯이 더 웃었다. 레이의 반응이 재밌어서 매번 놀린다는 건 엠마와 노먼사이에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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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어땠어요?”
“정말 즐거웠어요! 진짜 여러 가지를 보고 경험하고 왔어요. 바닷가에 가서 노먼이랑 작정하고 레이를 빠뜨린 것도 웃겼고, -바닷가 가서도 책이라니 너무하잖아요!- 셋이서 저녁에 도시 야경도 보고 왔어요. 밤인데도 사람이 정말 많고 활기차고 분주하더라고요. 이 세상이 빛나고 있고 그 중심에 저희 셋이 있는 기분이었어요.”
엠마의 긍정적인 활발함은 전염성이 강해서, J도 어느새 같이 미소 짓고 있었다.
“엠마가 즐거웠다니 다행이네요. 저도 같이 즐거워지는 기분이에요.”
J의 말에 엠마는 환히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이곳에 온 뒤로 서로 시간 맞추기가 어렵더라고요. 셋 다 각각의 일정이 있으니까요. 노먼은 요즘 자기 작업실에서 뭘 만드는지 잘 안 나오고, 레이는 더 많은 책들을 읽으면서 공부하고 있다니까요? 저도 이것저것 해보면서 미래에 뭘 할지 고민하고 있긴 하지만요.”
“가끔 꿈같아요. 당장에 살아남기 위해 앞을 생각하는 게 아니고, 순전히 나를 고려해서 무얼 할지 고민하는 것이.. 전자가 힘들어 보이지만, 사실은 후자가 더 어려운 일이죠. 자유는 아름다우면서도 가혹한 거니까.”
J는 엠마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 수많은 말들은 두서없어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보면 일관되어있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 부모님과 아이들이 같이 다니는 것을 봤어요. 엄마도, 아니 이자벨라도, 평범하게 사랑해줄 수 있었다면. ..그랬을까요? 엄마를 같이 데려나올 생각을 했다면...”
“뭐든, 당신들에겐 잘못이 없죠. 잘못이 있다면, 당신의 조상을 두고 왔던 옛날의 어른과, 외면하고 있던 현재의 어른일거에요.
미안해요.”
엠마는 J의 말을 듣고 놀란 듯 잠시 멈춰있었다.
“아뇨, 결과에 만약이란 것은 없어요.
사실 순간적으로 나온 말이었어요. 의미 없는 가정이죠. 저는 제가 그레이스필드에서 태어났기에 엠마라는 생각을 해요. 결국 모든 게 절 이루는 것들인걸요.”
“그래도, J의 말을 들으니까 마음속에 박혀있던 무언가가 녹아지는 기분이네요.
아주 가끔 왜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벌어졌는지, 누구 때문이냐고 탓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는데.”
엠마는 빙그레 웃음 지었다. 엠마의 눈가까지 곱게 접혀서, J는 고운 미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번에 레이가 수많은 책을 읽는 걸 보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공부나 독서 사실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냐고.”
‘뭐 그렇지. 근데 습관이 되어버려서.
그렇지만, 억지로 읽고 있다는 건 아니야. 지금은 나름 좋아해~ 내가 원해서 읽고 있으니까, 그러면 된 거 아닌가?’
엠마는 J의 앞에서 레이의 말을 흉내 내면서 웃었다. 절로 웃음이 새어나와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레이답다, 생각하면서도 우리 모두 그거면 됐지 않나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