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 번째의 여름
if.아이들이 인간세계로 탈출한 후의 이야기
이리어리 @E_riary
2.
첫 번째 해엔 인간계로 넘어와 정신이 없었다. 그들은 살아남았음에 안도했고 동시에 이곳에서도 살아남이야 했다. 엠마는 이곳에 적응하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받아들여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들 전체를 수용할 곳이 없었기에 각기 찢어져 살아야 했고 이곳의 규칙에 따라 교육받고 지도받았으며, 마지막으로 엠마 스스로 그곳에서 떠나왔다는 걸 받아들여야했다.
애초에 엠마 자신도 인간계로 넘어온다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치 하우스에서 탈출할 때 하우스 탈출만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듯 같은 맥락이었다. 자신들은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생은 지속될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곳을 벗어났음에도 엠마는 끝맺음이 하나도 지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인생의 중간 중간 벌어지는 일의 끝맺음들이 하나도 없어서, 엠마는 지금도 자신이 귀신들 사이 한복판에 있는 것 같았다. 그 겨울 속에, 쓰러져있는 이들을 하얗게 소복이 덮은 눈을 즈려밟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엠마는 살아갔다. 매일 아침 같이 사는 노먼과 레이에게 반가이 인사했고 가끔 만나는 그레이스 필드의 아이들을 반겼으며 후에 만난 이들과 즐거이 수다를 떨곤 했다. 하우스에서 시켜서나 출하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공부가 아닌 자신의 진로가 목적인 공부를 하기도 했고, 탈출 대비가 아니고 순전히 즐거움을 위해 아이들과 술래잡기를 하기도 했다.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일상들. 그 속에서 엠마는 잔잔한 일상의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맞이하게 된 첫 번째 여름의 끝자락에서 그들은 자그마한 축하 파티를 열었다. 노먼이 주최했고, 레이가 음식을 했고, 엠마는 준비를 도왔다. 노먼과 엠마는 레이가 만든 음식이 생각보다 맛있다고 하며 레이를 놀렸고, 그에 레이가 발끈하는 그런 소소한 시간이었다. 배가 부르고 그들 사이에 평화로움이 차곡차곡 쌓여갈 무렵 노먼이 입을 열었다.
“엠마, 요즘 잠 제대로 못 자고 있지?”
엠마는 가만히 노먼을 바라보다가 무언의 긍정을 했다. 사실이었으니까 딱히 부정할 이유는 없었다. 이상한 일이지, 그들은 그곳을 벗어난 지 오래인데 그곳의 잔향이 꿈을 타고 자꾸만 다시 찾아왔다. 그 옛날 하우스에서처럼, 간간이 들려오던 자장가를 베개 삼아 편안히 자던 어린 자신처럼, 다시 잘 수 있을까. 엠마는 자문했지만 동시에 그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알았다. 어릴 때의 자신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그것은 엠마가 작은 토끼 인형을 발견한 때부터 정해진 일이었다.
노먼이 말을 고르고 골랐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한다는 것보단 정확히는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다시 한 번 말을 고르는 중일 것이었다. 엠마는 고민해오던 것에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자신을 위해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괜찮지 않을 것이 무엇일까.
“괜찮아지게 노력해볼 거야. 그러면 잠도 잘 잘 수 있을 테고..”
노먼이 말을 꺼내기 전 엠마가 먼저 말했다. 노먼과 레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일상 속에서 그늘져가는 자신을 위해 이런 작은 휴식을 준비해준 그들의 정성을 모를 엠마가 아니었다. 엠마는 그런 그들의 다정한 위로가 고마웠다. 엠마의 말에, 노먼과 레이는 그 후로 다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일상을 서로에게 전하며 엠마 쪽으로 엠마가 좋아하는 음식을 밀어줄 뿐이었다. 엠마는 자신을 믿고 응원해주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힘을 내고 싶었다. 말을 통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따듯함이 그 안에 있었다.
<off_the_record_1>
“그렇게 해서 여기 오게 된 거에요, J.”
그렇게 엠마는 상담을 받게 되었다. 원체 처음에도 그들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도 잠시간의 상담을 받긴 했었다. 이곳엔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동족을 두고 왔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곳으로 넘어온 엠마의 일행을 위해 여기저기서 도움의 손길이 뻗어졌었다. 머물 수 있는 보금자리와 그들을 보호하려는 제도와 치료까지. 상담도 그중 일부였다.
처음에 잠시 받다 괜찮다 생각하고 그만두었는데, 이렇게 다시 시작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엠마는 생각했다.
“엠마의 옆엔 엠마를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있네요.”
엠마에게 자신을 J라고 불러달라던 엠마의 상담사는,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J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엠마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었는데, 반응이 없더라도 J가 자신의 말에 온전히 귀 기울이고 있음을 엠마는 알 수 있었다.
J와 엠마는 곧잘 침묵에 빠졌고, 놀랍게도 그 고요함이 불편하지 않아서 엠마는 J와의 상담을 좋아하게 되었다. 누군가 내 말을 온전히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매력적이고 위안이 되는 일인지. 처음엔 어색해하고 별말을 하지 않던 엠마는 곧 재잘재잘 자신의 일상을 J에게 전해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