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대야
한여름 @mysurnr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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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먼은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줄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엠마에게 혹시라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까 싶어서 포기했던 프롬포즈였다. 그런데 지금은 엠마에게 프롬포즈를 하러 가는 중이었다. 누구보다도 노먼은 엠마가 잘되기를 소원하는 사람이었고, 힘이 닿는 한 엠마를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길다의 말을 믿고 선뜻 가는 이런 짓은, 그래, 자신이 생각해 봐도 근거와 맥락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데도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노먼은 태생부터 그런 사람이었다. 결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정작 판단을 내리고 나면 성급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누구보다 재빨리 움직인다. 조금 전에 나눴던 대화가 계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주변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고 한 번쯤은⋯⋯.
인도를 타박타박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빨라져만 갔다. 해가 저물어 간 지 오래된 시각이었지만, 여전히 홧홧한 열기가 남아 있었다. 꼭 그 열기가 자신의 심장을 타고 빠져나간 감정의 잔재인 것 같았다. 꼭 불길을 삼킨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이 모든 건 그의 착각이고, 그가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걸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노먼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착각하면 어떻고, 착각하지 않으면 어떻단 말인가. 어렸을 때부터 남몰래 키워왔던 애정이었다. 어떻게 엠마를 좋아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누군가 그에게 왜 엠마를 좋아하냐고 물어봐도 마땅히 적합한 대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항상 그를 궁금하게 만들고, 동경하게 만들고, 이끌리게 만드는⋯⋯. 그렇다, 그에게 엠마는 평생을 걸쳐도 풀어볼 수 없는 난제였다.
엠마의 집 앞에 도착한 노먼은 잠시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한 손으로 더듬어 가며 자신의 모습을 점검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서 근사하게 차려입고 멋을 낸 다음에 프롬포즈를 할까, 라는 생각이 아주 잠깐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렇지만 지금, 바로 이 순간에 말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다른 한 손으로 고급스러운 녹색의 케이스를 만지작거리던 노먼은 긴장을 풀기라도 하는 것처럼 두어 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몇 달 전부터 들고 다니던 물건이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요란한 이벤트는 그의 성격상 무리였다. 이벤트를 한다고 쳐도 아주 소규모로 진행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는 ‘prom’mise가 적힌 목걸이를 주면서 프롬포즈를 하기로 결정했다.
케이스를 열면 엠마의 선명한 녹색을 닮은 페리도트가 반짝이는 심플한 디자인으로 장식된 목걸이가 있을 것이다. 몇 달 전부터 만드는 데 필요한 원석과 여러 부자재를 사들인 다음 몇 번의 실패를 걸쳐서 만든 작품이었다. 그를 가르쳐주던 세공사도 이렇게 빨리 실력이 느는 학생은 처음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만약 엠마에게 거절당하더라도 목걸이 하나만큼은 그냥 받아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그는 망설이지도 않고 초인종을 눌러 버렸다. 누구세요. 엠마의 목소리가 들리자 노먼이 특유의 상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야. 혹시 지금 시간 괜찮아? 연락하지 않고 무작정 찾아와서 미안해⋯⋯. 노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문이 열렸다. 엠마의 집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 노먼은 한참 동안 미로 같은 정원을 헤매다가 엠마를 찾아냈다.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의 나무에 매달아둔 그네 위에 앉아 있던 엠마는 노먼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어떤 상황이든 당황하지 않고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는 평판을 가진 노먼은 곧바로 엠마 앞에서 무너지듯이 무릎을 꿇고 더듬더듬 단어를 끊어서 프롬 파티에 파트너로 같이 가 달라며 부탁했다. 사실 그 당시에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지금까지 기억나는 것은 그 후 엠마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노먼 그 자신 또한 화답하듯 웃으면서 엠마에게 하나밖에 없는 작품을 선물했으며, 우리의 머리 위로 별똥별 하나가 반짝이며 소설의 배경처럼 떨어지고 있었던 것, 그 순간만큼은 행복했다는 것.. 그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