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대야
한여름 @mysurnr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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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친절이 섞여 있는 직원의 인사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노먼은 기다란 다리를 쭉쭉 움직여 인파를 헤치고 매장 안에 빈자리를 찾아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도착할 레이와 길다를 위해서 조금 더 시원한 곳에 자리를 잡아둬야 할 것 같았다. 몇 안 되는 소꿉친구 중 하나인 레이가 더운 곳에 앉던 시원한 곳에 앉던 노먼이 알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레이와 함께 약속 장소인 패스트푸드점에 도착할 길다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애석하게도 그들 중 특히 길다가 더위를 많이 탄다는 점도 있었고, 노먼은 길다에게 미안하지만 무리해서라도 부탁해야 할 게 있었다. 아, 정말이지 나 자신이 쓰레기처럼 느껴진다⋯⋯.
잠깐 한 살 어린 가족 같은 동생에게 무리한 부탁을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고찰하다가, 노먼은 매장 안에 시원한 자리를 포함해서 빈자리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이렇게 오늘따라 사람이 많은 것 같지,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하던 노먼은 무덥다 못해 살인적인 바깥 날씨를 새삼스럽게 자각했다. 5월에서 간신히 6월로 달력이 넘어간 시점인데도, 날씨는 저 혼자서 타임머신을 타고 7월과 8월 그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런 무더위는 집에서 에어컨과 아이스크림으로 하루를 견디며 보내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경제적인 카페나 패스트푸드점에 음료나 음식을 시켜두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대강 주변을 둘러보더라도 일정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아닌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삼삼오오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제자리에 서서 주문한 음식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봐도 세 명이 앉을 만한 자리가 나올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결국, 노먼은 한쪽 어깨에 멘 가방을 제대로 고쳐 매고 상대적으로 한산할 매장의 2층으로 느긋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2층으로 이어지는 패스트푸드점의 계단은 마치 이상한 나라를 옮겨둔 것만 같았다. 고전 게임 중 하나인 테트리스처럼 한 계단이 튀어나와 있다가도, 또 한 계단은 바닥으로 쑥 들어간 모양새였다. 그러니까 정신없이 급하게 올라가다가는 앞으로 넘어져 코가 깨지거나, 뒤로 넘어져 머리를 다치기 딱 좋은 계단이라는 소리였다. 유명한 건축가의 양식을 모티브로 삼아 신선하게 도전한 계단이라고 하던데, 아무래도 실용성과 아름다움은 거리가 먼 모양이었다.
다행히 노먼의 예상대로 매장의 2층은 사람들이 적은 편이었다. 널찍한 공간에 고작 열댓 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각각 무리를 지어 훌쩍 흩어져 자신의 할 일들을 하고 있었다. 다 먹은 쟁반을 앞에 둔 채 에어팟을 끼고 책을 읽는 사람도 있었고, 감자튀김을 한 곳에 몰아두고 케첩을 찍어가며 키득키득 소리 죽여 웃는 어린아이들도 있었고, 에드 시런보다 트로이 시반의 목소리가 더 취향이라며 열정적으로 같이 앉아 있던 동행에게 노래를 들어보라고 이어폰 하나를 건네는 사람도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노먼은 한 박자 늦게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며 눈으로 미리 찜해 둔 가장 좋은 자리로 향했다. 통유리창으로 만들어진 창문과 가깝기도 했고, 멀지 않은 곳에서 솔솔 시원한 바람을 내보내는 에어컨도 있었다. 더운 건 싫어. 그래도 시원한 곳에서 바깥을 구경하는 게 얼마나 좋은데. 그 언젠가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던 길다의 의견이 100% 반영된 자리였다.
노먼은 패스트푸드점 특유의 새빨갛고 딱딱한 의자 위에 앉았다. 평소 차갑고 불편해서 멀리하던 의자였는데, 오늘따라 땀을 식혀주는 차가움 탓에 괜찮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맞은편의 좌석 위로 매고 왔던 가방을 내려 두었다. 지금은 없지만 잠시 뒤에 올 일행이 있으니 합석은 받지 않는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이토록 빈자리가 많은데 굳이 자신의 앞에 앉을까, 하는 의구심도 잠깐이었지만, 예방 차원에서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서 기인한 행동이었다. 이제 레이와 길다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는 잠자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앉은 자리에서 내려다본 지상의 풍경들은 낯설게만 느껴질 정도였다. 그 정도로 건물들이 하나 같이 작고 석양에 부딪혀 형형색색으로 눈부시게 반짝였다.
때마침 주홍색으로 도색한 스포츠카 한 대가 도로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주홍색. 엠마를 닮은 색. 그 색 하나로 노먼에게 낯설었던 풍경이 순식간에 익숙한 공간으로 뒤집혔다. 만약 레이가 옆에 있었다면 어휴, 저 사랑에 처돈 녀석, 이라고 혀를 차며 쯧쯧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노먼이 알 바가 아니었다. 소꿉친구의 걱정을 빙자한 다정한 놀림을 약 20년째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노먼은 한참 동안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다가 뒤늦게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곧바로 전원을 짧게 눌려 화면을 연 노먼은 가볍게 터치스크린을 조작해 문자 메시지 함으로 들어갔다. 미리 음식을 주문했다는 것을 레이와 길다에게 알려줄 참이었다.
약속한 것보다 일찍 도착해서 미리 음식을 주문해 뒀어. 레이하고 길다가 매번 사 먹던 거로 시켰는데 괜찮지? PM 20:47
혹시 모르니까 주문한 메뉴를 알려줘야겠다. 아주 잠깐 고민한 노먼이 곧바로 한 문장을 덧붙여 전송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레이는 더블 치즈버거 세트고, 길다는 시저 샐러드랑 바닐라 셰이크야. PM 20:48
어떡하지? 난 바닐라 셰이크 하나면 충분해. 아침부터 굶은 레이와 다르게 점심 먹고 나와서. PM 20:48
문자 메시지를 발송하기가 무섭게 답장이 되돌아왔다. 가만, 레이의 휴대전화로 전송했는데 왜 레이가 아니라 길다가 답장하지. 노먼이 아리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뒤늦게 길다의 운전 실력을 떠올려 냈다. 평소 차분하면서도 섬세했던 길다의 성격을 믿고 그녀의 차에 올라탔다가 지옥의 문턱을 밟고 돌아온 것도 가까스로 떠올려 냈다. 거의 현직 카레이서 수준이었지⋯⋯. 덕분에 지각은 면했지만⋯⋯. 규정 속도와 신호를 아슬아슬할 정도로 지키며 운전하는 길다의 모습을 일 년 하고도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었다.
아, 미안. 레이가 운전하고 있어서 내가 답장했어. PM 20:49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노먼의 짐작을 뒷받침해 줄 길다의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예전에 지나가듯이 이야기한 길다의 운전 솜씨를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예전부터 느낀 것이었지만 어떤 때에는 레이가 자신보다 기억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허물없이 한동네에서 자란 자신과 엠마, 그리고 돈과 길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도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어린 시절의 흑역사를 누군가에게 확 불어 버리겠다는 협박성 부탁에 못이기는 척 넘어간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해했다는 듯이 두어 번 고개를 주억거린 노먼이 다시 휴대전화의 화면으로 집중했다.
괜찮아. 내가 먹으면 되니까. 그보다 어디쯤 도착했어? PM 20:50
골디 펀드 고등학교. 10분이면 도착한다고 했어. PM 20:50
OK, 레이한테 운전 조심하라고 전해 줘. PM 20:51
OK, 이따 봐. PM 20:51
그 대화를 끝으로 노먼은 휴대전화의 전원을 짧게 눌러 화면을 꺼버렸다. 그러고는 새빨간 테이블에 이마를 들이박은 채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머릿속 한편으로는 패스트푸드점의 위생 따위를 고려하고 있었지만, 이제 곧 길다와 레이를 만나야 하는 노먼으로선 알 바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엠마의 프롬 파트너로 소문난 길다를 어떻게 구워삶아 먹어야 할 것인가. 제기랄⋯⋯. 레이의 말버릇 중 하나를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노먼은 한 번 더 머리를 테이블에 들이박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들도 공유하고 있는 공공장소인 점을 고려해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들고 바른 자세로 앉는 것을 택했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다른 한 손으로 손장난을 치던 노먼은 조금 전의 생각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렇다, 고등학생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롬 파티까지 10일 남은 시점이었다. 보통 두 달 전까지 파트너를 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드레스 코드를 피해 의상을 정하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엠마와 노먼 모두 대학 진학 관련으로 무척이나 바빴던 터라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엠마 혼자만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았다. 수업하던 선생님마저도 프롬 파티에 참석할 생각이 없는 거냐고 물어보는 것만 봐도 그랬다. 사실, 객관적인 상황만 따져본다면, 엠마가 프롬 파티에 참석하는 것은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것일 수도 있었다.
엠마는 어릴 적부터 독보적으로 뛰어난 운동 신경을 살려서 승마 전공 쪽으로 주립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실제로도 승마 활동으로 유명하고 수상 실적도 쓸어 모으고 있는 주립 대학에 합격하는 것에 성공했다. 전공 지식이 없는 노먼의 눈으로 엠마의 경기를 봐도 다른 사람보다 훨씬 유연하고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 경기를 관람한 노먼은 오히려 대학이 엠마를 스카우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리고 컨설턴트의 말에 따르면 스포츠 관련으로 진학한 학생들은 보통 이 시간대에 각자의 전공을 연습하는 데에 공을 들인다고 했다. 그 말은 즉 엠마 또한 예외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엠마가 원하는 미래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잠자코 엠마의 연습을 응원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도와주는 것으로 만족했다. 하지만 이미 엠마의 파트너로 길다라는 소문이 돈 시점에서 프롬 파티에 엠마가 참석한다는 건 기정사실로 변했다. 이제 노먼이 프롬포즈를 한다면 엠마의 파트너라고 소문난 길다의 처지가 난처해질 것이다. 분명 가벼운 소문이라도 날 텐데, 괜히 그런 것에 마음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만일 하나 벼락에 맞을 확률로 엠마가 자신의 프롬포즈를 받는다고 해도, 길다의 비어 있는 파트너 자리를 신경 쓰느라 엉망이 될 게 뻔했다.
가장 이상적인 계획은 길다를 설득해서 다른 파트너를 찾도록 힘써주는 것인데⋯⋯. 프롬 파티까지 10일 남은 시점에서 이 설득이 타당성 있고 말이 되는 소리인가⋯⋯. 노먼은 다시 한번 자신의 쓰레기 같은 마음을 확인하고 자괴감에 휩싸였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그만두는 게 낫지 않을까? 노먼은 진동벨을 손안에 굴리며 생각했다. 자신의 욕심을 죽이고, 또 죽이고, 또 죽이고, 또 죽이다가⋯⋯. 어쩌면 먼 미래에서 그때 너랑 못 가서 아쉬웠다고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엠마가 아니라면 프롬 파티에 갈 생각도 없었지만⋯⋯. 대략적으로 생각을 정리한 노먼은 홀가분하게 고민을 털어냈다. 그래, 그렇게 해야겠다.
때마침 기다리고 있었던 레이와 길다가 2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노먼은 자리에 바로 앉은 채로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레이와 길다는 각자 손부채질을 하며 지친 얼굴로 노먼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자에 널브러져 후덥지근한 열기를 내보내는 데 집중하던 길다는 곧 궁금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그 옆에서 레이가 맞장구를 쳤다. 그래, 나라면 몰라도 길다까지 부른 거라면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쓸데없이 여러 소리 말고 털어나 봐라. 그 말을 끝으로 레이가 거만하게 다리를 꼬며 몸을 뒤로 젖혔다. 노먼은 잠시 눈웃음으로 정적을 때우며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역시 졸업하기 전에 제대로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는 변명이 잘 먹힐 것 같았다. 엠마는 집이 가까워서 매일 보다시피 했기 때문에 이야기할 시간은 충분했고, 돈은 대학에 입학하는 대신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극단에 들어가 연기를 하며 커리어를 쌓고 싶다며 연락이 안 되는 중이었다. 그렇게 되면 남은 건 레이와 길다 뿐이었다. 맥락도 근거도 없는 확신이지만, 이 둘은 그 정도의 변명으로도 이해할 것만 같았다. 노먼이 특유의 신뢰감을 주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내려는 그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진동벨이 요란스럽게 울려댔다. 자연스럽게 노먼을 입을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 노먼을 다시 제자리에 앉히며 레이가 진동벨을 잡아채고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쟁반 들고 다시 계단 올라오다가 뒤로 자빠지기라도 하면 어떡하냐. 길다랑 이야기 나누고 있어, 내가 얼른 뛰어갔다 올게. 어느새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누르고 있던 길다도 시원한 걸 먹고 싶으니까 빨리 다녀오라며 레이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배웅했다. 결국, 노먼도 어쩔 수 없이 웃으며 고맙다고 말하며 레이를 배웅했다. 레이가 무사히 내려가는 걸 확인한 노먼이 다시 길다를 바라보며 시선을 마주쳤다. 길다 역시 들고 있던 휴대 전화를 내려둔 채 노먼과 시선을 마주쳤다. 노먼. 길다가 그를 부드러운 목소리로 호명했다. 어쩐지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상을 감지한 노먼이 말을 하지 않고 화사한 눈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금 엠마한테 프롬포즈하는 걸로 고민하고 있어?
순간적으로 공학 수학에 뛰어난 재능이 있다며 월반을 권했던 선생님이 극찬하던 천재의 두뇌는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길다. 노먼은 일단 재빨리 부정했다. 그리고 변명하듯이 한 마디를 덧붙여 설명했다. 나하고 엠마는 지금 대학 진학 관련으로 얼마나 바쁜데. 요새도 등하교할 때마다 잠깐잠깐 이야기하는 게 다라니까? 길다가 조곤조곤한 어조로 반박했다. 거짓말, 예전에 중학교 다닐 때부터 그랬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마지막 프롬 파티는 엠마하고 가겠다고. 그렇다, 분명 예전의 노먼은 길다와 레이에게만 비밀스럽게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노먼은 머리를 굴려 현 상황을 타개할 계책을 생각해내려 했지만, 길다가 쉬지 않고 그를 밀어붙였다. 다년간 노먼을 지켜본 길다로선 이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길다가 생각한 노먼은 언제나 자신이 뒷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레이와 엠마도 그런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심한 사람을 꼽으라면 백이면 백 모두 노먼을 선택할 정도였다. 노먼을 잘 알지 못하는 교내의 다른 학생마저 ‘유난히 같이 다니던 그룹에 신경을 쏟아붓긴 했지⋯⋯. 그 애가 좋아하는 애들이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는 소문으로 나도 암암리에 알고 있어. 그런데 걔는⋯⋯. 글쎄, 모르겠다.’라고 평가할 정도라면 알 만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길다는 레이가 없는 지금, 이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사실, 노먼과 엠마에 대해서는 길다 그 자신보다 레이가 이야기를 꺼내기에 더 적절하지도 몰랐다.
하지만 레이라면 아마 조곤조곤 말하다가도 본인의 감정에 휩싸이고 결국, 상대에게 화내듯이 제 생각을 이해해 달라며 윽박지를 게 분명했다. 그런 식으로 노먼에게 이기적으로 굴어달라고 부탁하고 싶지는 않다. 길다는 그런 식으로 사는 방식을 배워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적으로 그에게 호소할 수도 없었다. 길다는 그저 노먼이 이해 가능한 방향으로 욕심을 내도록 유도하고 싶었다. 한 학년 아래지만 나도 눈과 귀가 있어. 애정의 깊이를 헤아릴 수는 없지만, 노먼이 엠마를 좋아하는 것도 알아. 만약에 노먼이 정말로 프롬 파티에 관심이 없었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나와 레이를 부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 길다의 추궁에도 노먼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알 수 없다는 듯이⋯⋯. 모호한 분위기를 감싸 안은 채 묵묵히 앉아있었다.
빈말로 말해 보려고 해도 노먼은 그렇게 대인 관계가 넓은 편은 아니잖아. 프롬 파티에 참석하는 애 중에서 노먼이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나하고 레이 말고 더 있어? 여전히 노먼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길다는 어쩐지 노먼이 수긍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침을 삼킨 길다가 말을 이었다. 혹시 내가 걱정된다면⋯⋯. 그 순간 길다는 차를 타고 오면서 레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녀석은 정말이지 똑똑하고 나중에 어떤 분야로 가든 성공하겠지만⋯⋯. 우리가 엮인 일만큼은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해. 엄한 곳으로 삽질을 하지. 아마 엠마의 파트너가 너로 정해졌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물어보기가 무서워서 우리를 부르는 게 틀림없어. 쉽게 말해 나는 들러리라는 소리고. 길다, 네가 목적이라는 말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계단 사이로 어슴푸레 보이는 검은색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길다는 시선을 계단으로 일별했다가, 다시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노먼을 쳐다봤다. 내가 엠마의 파트너라는 소문은 개소리란 말이야, 알아들었어? 그때서야 노먼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특유의 산뜻하면서도 화사한 태도를 집어치운 노먼은 다시 한번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충격 요법을 쓰기 위해서 개소리라는 심한 표현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효과가 좋을 줄은 미처 알지 못했는데. 길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짧게 풀어서 설명했다. 노먼이 며칠 동안 삽질했던 소문의 경과는 이랬다.
학교에서 제공해준 마사에 말을 맡기고 돌아온 엠마가 시간이 남아서 프롬 파티 준비하는 것을 도와주던 날이었다. 이야기의 화제는 자연스럽게 프롬 파티로 흘러갔고, 누군가 엠마에게 정말로 프롬 파티에 참석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엠마는 파트너가 있으면 당연히 참석할 생각이라고 말했고, 프롬 파티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누구에게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할 생각이냐며 추궁하는 목소리가 늘어만 갔다. 짖꿏은 장난에 난처해진 엠마는 급기야 옆에서 소품을 만들고 있던 길다의 어깨를 붙잡고 얘가 내 파트너야, 라고 농담 식으로 말한 게 소문의 시작이었다.
모든 걸 전해 들은 노먼은 허탈한 듯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문득 떠오른 의문을 필터 없이 입 밖으로 내보냈다. 그게 사실이라면, 길다 너는 누구하고 가는 건데. 프롬 파티 참석자 명단에 네 이름이 쓰여 있었어. 우리 학교는 오직 12학년만 참석할 수 있고, 나머지 학년은 12학년의 초대를 받아야지 가능하잖아. 잠깐의 망설임 끝에 길다는 노먼과 같은 반인 리암에게 몇 달 전에 파트너 신청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프롬 파티 날까지 비밀로 해야 해. 한참 미식축구 선수로 주가를 올리고 있던 리암의 인기를 생각한 노먼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보다 편안하게 풀린 노먼의 표정을 바라보던 길다는 다시 한번 세뇌시키듯이 말했다.
엠마한테 파트너 신청해도 아무 문제 없다는 소리야. 조금 더 멋대로 행동해도 괜찮아. 엠마가 노먼을 싫어할 리가 없으니까. 정말로 알아들은 거 맞지.? 완전히 편안해진 표정으로 노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잠시 망설이던 노먼은 미련이 가득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하지만 엠마가 바쁘다고 거절하면⋯⋯. 노먼? 그의 말을 끊고 길다가 탄식하듯 이름을 불렀다. 이 정도까지 했으면 더 이상 삽질하지 말자. 어느새 다가온 레이가 한 손으로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둔 채 무심한 듯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래, 이럴 시간에 엠마 집으로 가서 프롬포즈라도 해라. 다시 길다의 옆자리에 앉은 레이가 햄버거의 포장지를 뜯으며 말했다.
시간도 적당하네. 뭐하냐? 빨리 안 가고? 무척이나 진심처럼 보이는 레이의 말과 행동을 지켜본 노먼이 얼떨결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거 진심이야? 얼음이 녹아 밍밍해진 콜라를 빨대로 쭉 빨아들이던 레이의 눈썹이 올라갔다. 100% 진심이구나. 옆에 앉아서 레이의 감자튀김을 주섬주섬 주워 먹던 길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노먼은 자기가 산 음식을 한 입도 먹어본 지 못한 채 반강제적으로 가방을 건네받으며 레이와 길다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쫓겨나는 수밖에 없었다. 창문 밖으로 노먼의 인영이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면서, 다 식은 햄버거와 시저 샐러드를 뒤적거리던 그들은 한 차례씩 말을 주고받았다.
노먼의 저런 태도야말로 참사랑에 가까운 걸까? 시저 샐러드의 채소를 포크로 푹─ 찍으며 길다가 말했다. 한 사람 앞에서 바보처럼 고민하다가 직접 확인하기도 못 한 채 우유부단하게 구는 저런 모습이 참사랑이라고? 그걸 몇 년째 받아주는 우리의 열정 페이는 누가 보상해 주냐. 김이 빠져 이상해진 콜라를 단번에 마시던 레이가 눈을 찡그린 채 되물었다. 하지만 계기가 생기면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점이 대단하잖아. 길다가 다 녹은 바닐라 셰이크를 빨대로 휘저으면서 말했다. 티슈로 입가를 훔친 레이가 평소의 능청스러운 어투로 덧붙였다. 그것도 못 하면 내 친구도 아니지. 하지만 둘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길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아, 어찌 되었든 간에 둘이 행복했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