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은 녹아서 흐르고
다담 @dadam_tpn
4.
질리언은 야심찬 얼굴로 배달된 상자를 개봉한다. 테이프 위로 죽죽 지나가는 커터칼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캐롤은 이내 모두가 바라던 반응을 보여주었다. 집이 떠나가라 환성을 지르고 폴짝폴짝 뛰며 질리언의 목을 끌어안은 것이다. 이 계획의 입안자인 올리버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 모양을 지켜보았다. 상자 안의 물건은 다름 아닌 아동용 풀장이었다.
“좋은 생각을 했네.”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의 절반을 혼자 해치우고 나머지는 자칭 빨래 군단에게 던져주고 온 레이가 손을 탁탁 털며 말했다.
“저런 걸 좋아할 나이잖아.”
올리버가 부드럽게 답했다. 레이는 픽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캐롤은 가혹하리만큼 두뇌의 발달을 종용하는 사육장에서 비교적 일찍 벗어난 덕인지 가장 그 또래 아이다웠다. 똘망똘망하기야 했지만 목숨을 걸고 싸운 연장자들에 비해 그늘이 적은 것은 당연하다. 때문에 다른 이들은 거의 대리만족을 느끼는 기분으로 캐롤을 보살피고 있었다. 둘은 질리언이 한 손으로는 캐롤의 손을 잡고, 한 손으로는 나이젤의 뒷덜미를 잡아끌며 마당에 내려서는 모습을 말없이 구경했다.
“캐롤이 노먼을 아직도 무서워해.”
적막을 깨는 목소리였다. 레이와 올리버는 고개를 돌려 기척 없이 다가온 안나를 본다. 허리까지 오는 금발을 높이 올려 묶은 채였다. 레이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아직도라고 묻고 싶지만, 그럴 만도 하지. 그때 걔가 좀 무서웠냐.”
“노먼도 고생이던걸. 첫인상이 여간 바뀌질 않아서.”
유아기의 트라우마는 생각보다 길다. 한참 어렸던 캐롤이 맨 처음 목격한 노먼은 하필이면 냉랭한 보스로서의 모습이었고, 몇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무시무시한 인상이 뿌리깊게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노먼은 그놈의 얼음 제왕 이미지를 걷어치우기 위해 캐롤 앞에서 온갖 재롱을 떤 바 있었지만 (그리고 레이는 치를 떨었지만) 별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캐롤은 여전히 노먼을 보면 일차로 엠마, 아니면 레이, 아무튼 노먼 아닌 그 누군가의 등 뒤로 숨어들었다.
셋은 마루에 나란히 앉아 생각에 잠긴다. 마당의 정세는 어느새 지나가던 바이올렛을 희생시키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질리언의 물줄기 공격을 도로 뿜어내는 바이올렛의 방어가 제법 웃겼던 모양인지 캐롤이 또 해달라고 졸라서, 바이올렛은 묵묵히 돌고래가 되어 질리언에게 눈으로 욕하는 중이었다.
레이가 문득 미간을 찡그린다. 그놈은 능력치 맥스를 찍은 주제에 걸어다니는 걱정거리라고! 자신의 머리카락도 그놈처럼 하얗게 세어버리는 일이 있을 시 반드시 피해보상을 받아내겠다고 다짐하며, 레이가 내뱉는다.
“그건 걔 몫이지. 누가 혼자 음침하게 망토 뒤집어쓰고 부엉이 흉내내며 폭주하랬나.”
졸지에 사춘기 폭주족으로 전락한 전직 미네르바를 변호하려는 듯 안나가 난처하게 웃는다.
“그... 폭주라고 하기엔 스케일이 좀 컸잖아?”
“나름대로의 사정과 계획이 있었잖아. 사실 그 쪽이 더 공감하기 쉬웠고.”
올리버가 거들었다. 레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쨍하고 맑았다.
그 천재성을 의심한 적은 없다. 레이 자신이라도 엠마가 아니었다면 찬동했을 것이다. 오랜 친구가 소위 ‘얼음 제왕’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레이는 오히려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다른 쪽이었다. 캐롤이 숨을 때마다 노먼의 얼굴에 한순간 스치는 표정, 그게 그토록 꼴사나울 수가 없었다.
레이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일어섰다. 골치를 앓아봤자 아무 소용없는 것을 아는 탓이었다. 어차피 그 녀석을 바꾸는 건 한 사람이다. 옛날부터 늘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