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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녹아서 흐르고

다담 @dadam_tpn​

5.

 

“좀 나아?”

 

노먼은 조금 죽을 것 같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엠마가 편의점에 들어가서 사온 것은 기분좋게 서늘한 얼음컵이었다. 그것까진 좋았는데, 엠마가 직접 뺨에 대주는 통에 얼굴이 달아올라 결국 하나마나 한 일이 되어버렸다. 노먼은 욕망과 생존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얼음컵을 본인이 들겠다고 말한다. 엠마는 노먼이 과연 그것을 들 힘은 있는지 의심하는 눈치였지만 컵을 넘겨준다. 노먼은 이미지 제고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세미나는 어땠어?”

 

“음, 재미있었어. 확실히 연령대가 젊은 편이다 보니까 참신한 의견이 많이 나오더라.”

 

“정말 기계공학 쪽으로 학위를 딸 거야? 물론 너라면 잘하겠지만 그래도.”

 

노먼은 그저 미소지었지만, 엠마는 잠깐의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분명한 망설임이다. 엠마는 노먼이 모든 분야의 지식을 편식 없이 바로 흡수한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럼에도 기계공학은 그의 기호에서 다소 먼 순위에 위치했다. 의아할 수밖에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엠마는 짐작하는 바가 없지 않았다.

 

집까지는 30분 정도 걸어야 했다. 방금 전 노먼의 상태를 기억하는 엠마는 미친짓이라고 생각했고, 노먼은 이번에야말로 생존본능을 밀어두며 걷자고 아득바득 우겼다. 엠마가 본인의 학업과 행정 논의를 병행하느라 바빠서 이런 식으로 단둘이 남는 시간은 드물었다.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

 

“나는 괜찮아.”

 

“…믿어볼게.”

 

지글거리는 햇빛은 보도블록을 한계치까지 달구었다. 맨발로 디디면 화상을 입지 않을까 싶은 그 땅을 밟으며 엠마는 손차양을 하고 문득 노먼을 보았다. 항상 따뜻하게 웃던 친구. 지금의 노먼도 그런 미소를 곧잘 지었지만, 어딘가, 조금. 엠마는 인간 세계로 넘어올 때부터 느끼는 기시감을 예민하게 자각한다. 보스였을 때의 싸늘함은 가신 지 오래지만 그렇다고 엠마가 알던 노먼으로 돌아온 것도 아니다.

 

“하고 온 이야기는 잘 마무리됐어?”

 

“그럭저럭? 단순히 주소 갱신 문제여서 생각보다 어려울 것 없었어. 아, 노먼.”

 

자신보다 키가 두 뼘은 큰 친구에게 엠마가 고개를 쳐들었다.

 

“나 부탁할 게 있어. 식용아에 대한 여론이 아직도 갈리잖아?”

 

노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착한 지 몇 년이 되어가는데다 엠마를 대표로 끊임없이 소통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식용아들은 난민에 가까운 존재라서, 종종 고까운 눈길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엠마가 말을 잇는다.

 

“그래서 정부는 아예 나를 홍보해 거리감을 좁힐 생각인가 봐. 이번에 정식 초청이 들어왔어. 거절할 핑계도 생각나지 않아서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줄 수 있어?”

 

또다. 찰나지만 입가의 미묘한 뒤틀림. 엠마는 섬세한 관찰보다는 큼직큼직한 시각에 강한 편이었지만, 한번 마음먹은 것은 포착해내고야 만다. 그것은 언짢은 표정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어렵겠어, 엠마. 나도 학계 일정이 있어서.”

 

“아직 언제인지도 말 안 했는걸.”

 

노먼의 부드러운 얼굴이 약간의 낭패감으로 물든다. 엠마는 조금 더 추궁해 보기로 했다.

 

“나는 아직도 정치적인 그런 것에는 약해서, 노먼이 도와주면 좋을 것 같은데. 안될까?”

 

“엠마, 그들은 너를 초청한 거잖아. 내가 같이 가면 오히려 부정적일 수도 있어.”

 

“그렇지 않아! 희대의 천재 소년 노먼이잖아? 어차피 홍보용이기 때문에 더 좋아할걸? 아, 노먼을 그렇게 소비하겠다는 뜻은 아냐. 미안해.”

 

“엠마…….”

 

햇빛이 귓가에 대고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 빛은 분명 소리를 동반하지 않는데. 노먼이 속눈썹을 내리깔고 이마를 짚는다. 손바닥이 만든 그늘 아래로 엠마의 시선이 닿는다. 여지없이 곧은 시선이다.

 

“노먼, 나 좀 볼래?”

 

“…….”

 

“대표, 대화, 정치, 인간 세계로 온 이후 네가 한 번도 하려고 들지 않았던 것들이야. 그게 네 뜻이라면 상관없지만, 내 생각에 너는ㅡ”

 

“ㅡ엠마, 제발!”

 

노먼이 참지 못하고 엠마의 어깨를 두 손으로 쥐었다가, 다음 순간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며 뗐다. 손을 거둠과 동시에 한 발짝 뒷걸음질친다. 엠마는 물끄러미 그 한 발짝만큼의 거리를 가늠하다가 고개를 든다. 그리고 멈칫한다. 노먼의 얼굴 전체에 어린 것은 공포였다. 그렇게밖에 설명되지 않았다.

 

“노먼.”

 

엠마는 다시 발 끝에 시선을 고정했다. 가장 높이 떠서 지글거리는 태양 아래 그림자가 지독히 짧았다. 기만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엠마가 물었다.

 

“뭐로부터 도망치는 거야?”

 

날이 너무 뜨거워서 기절할 것 같다. 노먼은 이를 악물면서도 앞으로 다가가려 하지 않는다. 엠마를 안심시키려면 그 손을 잡고 얼굴을 마주보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아는데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서. 노먼은 쓰라리게 절감한다. 이것은 그의 속죄다. 좁힐 수 없는 간격이다.

왜냐하면.

 

“나를 다치게 할까 두려워?”

 

엠마가 눈을 맞춰왔다. 아주 예전부터 노먼이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그 눈빛이다. 숨기지 않는, 곧은, 대상 너머의 어딘가를 꿰뚫어보는. 노먼은 몸속 어딘가가 허물어지는 기분이었다.

 

함께하고 싶다. 옛날 그 어느 날처럼 손을 잡고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하고 싶어. 그 때는 둘의 걸음이 일치했으니까. 하지만 한 번 틀어져버린 지금, 너무 먼 곳을 찍고 돌아온 지금, 그 때와 같을 수 있을까? 다시 너의 삶에 감히 발을 들여놓아도 될까? 너는 예전부터, 한결같이, 곧아서. 차마 나는.

 

노먼은 표정을 가리기 위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다. 이게 그의 최선이었다. 사랑하는 친구의 사랑하는 그 모습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발목을 묶는 수밖에 없었다. 나서서 발언하지 않고, 개입하지 않고, 그에게 주어진 지성을 오로지 학문-그것도 최대한 마찰이 없는-에만 쏟는 것. 엠마의 다정한 친구 노먼으로만 남아있는 것. 엠마의 동료나 협력자조차 되지 않는 것.

 

캐롤이 그를 무서워한다면, 그저 그렇게 씁쓸한 미소로 있는 것.

 

너무 더웠고, 머리는 깨질 듯 아팠고, 입밖으로 생각지 않은 말이 흘러나왔다.

 

“엠마, 나는 내가 두려워.”

 

“나는 안 두려워!”

 

이것 역시 들으리라고 생각지 않은 말이었다. 노먼은 놀란 눈으로 엠마를 쳐다보았다. 엠마는 어딘가 화가 나 있다. 마치 하우스 시절 레이에게 경고하던 모습 같다.

 

“노먼은 그냥 노먼이야. 더도 덜도 말고 딱 노먼! 미네르바도 아니고, 얼음 제왕도 아니야. 그리고 나는 애초 네가 아닌 그런 것들이 두렵지 않아.”

 

“엠마, 나는!”

 

“사람은!”

 

버럭 말문을 막아버린 엠마가 노먼을 노려보았다. 엠마 스스로도 뭐에 화가 치밀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입밖으로 쏟아지는 말은 내뱉어야 했다. 이 바보같은 천재에게!

 

“사람은 나아가야지. 앞에 뭐가 있든, 뒤에 뭘 남겨두었든, 우리는 나아가야지! 그게 너와 내가 살아온 방식이잖아! 겁먹고 뒷걸음질치면 뭐가 달라지는데? 자신도 모두도 구하지 못하고 출하되겠지, 안 그래?”

 

“…엠마.”

 

“네가 괴물이라고 생각해? 나를 해칠까 무서워? 노먼은 나를 그 정도밖에 못 믿는 거야?”

 

노먼은 뒤통수를 맞은 표정을 지었다. 그게 그렇게 되나? 엠마의 치켜올라간 눈썹이 서서히 내려앉았다. 분노는 애초 엠마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느리게 표정을 추스린 엠마가 노먼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왜 혼자 괴물로 남아있으려고 들어. 노먼, 정말로 상관없어. 나는 노먼의 도움이 필요하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했으면 좋겠고, 그리고 난 감당할 수 있어. 흔들리지 않아.”

 

노먼은 잠시 멍해진다. 머리가 평소처럼 돌아가지 않는 것은 분명히 이 뙤약볕 때문일 것이다. 귓가에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 엠마는 방금, 그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음을 선언했다. 노먼이 그 옛날의 노먼이 아니라고 해도, 돌이킬 수 없다 해도, 그래도 너는 너라고. 노먼 이외의 다른 어떤 과거의 그림자도 엠마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고. 노먼은 허리에 손을 짚고 선 엠마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렇구나, 애초에 해칠 수 없는 거였구나. 오만이었구나. 너는 오히려 내 손을 끌고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인데. 발목에 얼어붙은 무언가가 이기지 못하고 물로 흘렀다. 얼음, 땡. 노먼은 그 환청과 함께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엠마가 그의 손을 잡으려면, 먼저 감춘 손을 내밀어야 한다.

 

노먼은 뒷걸음질쳤던 거리를 되돌렸다. 엠마의 앞으로 나아갔다. 어릴 때와 같은 거리로, 같은 보폭으로, 손을 잡고,

 

그대로 냅다 허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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